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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story

3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귀주대첩 강감찬 장군 업적)

by ⊂∵⊃⊆∵⊇∈∵∋ 2023. 11. 8.

993년 1차 고려거란전쟁은 서희의 담판으로 막아냈고, 1010년 2차 고려거란전쟁은 거짓항복으로 거란군이 철수하였으나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18년 거란은 재차 고려를 침략합니다. 오늘은 3차 고려 거란 전쟁과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역사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실제 역사를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쟁을 하는 나라 간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세요.

 

 

2차 고려거란전쟁이 끝났지만.

2차 거란의 침략으로 개경이 약탈당하고 고려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 가는 수모를 당했지만 친조를 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거란을 철수하도록 하고 철수하는 거란군을 섬멸하며 고려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려거란전쟁

 

전쟁 이후 고려는 또다시 침공할지 모르는 거란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송악성, 서경 등의 방비를 단단히 함과 동시에 거란에 사신을 보내 철군해 준 것에 대한 사례와 거란 성종의 생일 축하, 동지하례 등의 외교적 활동을 통해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거란 또한 고려원정으로 입은 피해가 적지 않았으므로 군을 정비하고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를 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거란은 고려를 압박했습니다.

 

거란은 현종이 친조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약속을 지키라고 거듭 요구했습니다. 친조란 신하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배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복속국으로 신하의 예를 다하라는 뜻인데,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거란 성종은 강동 6주를 내놓으라며 협박했습니다. 강동 6주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얻은 지역으로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말합니다. 강동 6주는 이미 고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경제적 요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강동 6주
강동 6주

 

고려 영토로 편입된 이래 강동 6주를 개척해 성을 쌓고 여진족 등과의 교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취하는 곳이 되었고 지난 2차 거란 침입에서도 보았듯이 쉽게 함락되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고려입장에서는 거란에게 절대 넘겨줄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거란이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러도 고려는 반환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거란은 1013년 야율행평을 시켜 강동 6주를 답사하게 한 후 1014년 재차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고려는 야율행평을 억류해 버립니다. 같은 해 거란은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보주성을 점령하며 또다시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합니다.

 

지속적인 반환요구 등 거란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고려는 송나라에 동맹을 타진합니다. 거란과의 일전을 대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미 쇠약해져 거란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고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3차 고려거란전쟁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가 1018년(현종 9) 드디어 3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합니다. 현종의 친조거부, 강동 6주 반환 거절 등을 이유로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옵니다. 거란 장수는 소배압이었으며 이에 맞설 고려 장수는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이었습니다. 강감찬을 상원수로 하고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거란에 맞섰습니다.

 

 

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 장군의 활약은 두드러집니다.

 

고려군을 이끄는 강감찬 장군은 영주에 주둔하며 거란군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단 흥화진에 병사 1만 2천 명을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성 쪽에 흐르는 대천을 소가죽들로 이어 물의 흐름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대천에 물은 줄어들었고 거란군이 보기에 대천은 얕아보였습니다.

 

의심 없이 거란군은 마른 대천으로 진격해 왔습니다. 그때 강감찬 장군은 막아두었던 소가죽 둑을 열어 적을 물살에 휩쓸리게 만듭니다. 적이 혼란해지자, 매복했던 군사를 풀어 거란군을 섬멸하였습니다.

 

패전한 거란군은 군사를 수습해서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자주에서 기다리던 강민첨에게 다시 패배하였고 마탄에서는 조원이 이끄는 부대를 만나 만 명이 넘는 군사를 잃게 됩니다.

 

그야말로 강감찬 장군의 기지가 빛을 발하는 대승이었습니다.

 

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

거란 장수 소배압은 고려에게 혼이 났음에도 거란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강감찬 장군은 여기까지 읽고 있었다는 듯이 개경수비를 든든히 해두고 있었습니다.

 

 

성 밖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성 밖에는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즉, 청야전술을 펼친 것입니다. 청야전술이란 방어 측에서 일부러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전술입니다.

 

강감찬 장군이 청야전술을 펼치자, 거란군은 난감했습니다. 전쟁은 보급이 생명인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으니까요. 고려의 전술에 거란은 개경에서 무작정 남하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거란군은 굶주리며 전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거듭 패배하고 퇴각하며 귀주로 몰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귀주는 거란군의 사지였습니다. 귀주에서는 이미 강감찬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란 장수 소배압은 고려군의 전력을 비슷하다고 판단하고 맞부딪혔으나, 얼마 후 개경을 지키던 고려 장수 김종현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하면서 거란군을 일방적으로 몰아쳤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수천 명만 살아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 전투가 귀주대첩 (1019년)입니다.

 

3차 고려거란전쟁은 강감찬 장군과 고려 장수들의 활약으로 끝이 나고 거란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1019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의 실상을 염탐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건재함을 알고 난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습니다. 이후 양국은 사신을 교류하며 친선을 도모합니다.

 

지금까지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서희, 강감찬 장군과 같은 전쟁 속에서 활약한 고려 장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1차, 2차, 3차로 이어지는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에게는 북쪽 국방에 대한 대비를 엄중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외세 침입이란 시련을 통해 왕권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반면 거란은 소모적인 전쟁으로 얻은 것은 없고 국정만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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