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년 1차 고려 거란 전쟁이 서희의 담판으로 끝난 이후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합니다. 1차 고려거란전쟁은 서희의 외교 회담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났고 3차 고려거란전쟁은 강감찬 장군의 활약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2차 고려거란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끝이 났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역사를 알고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보게 되면 그 재미가 배가 됩니다. 역사 속 등장인물들이 처했던 상황과 국경을 맞대고 대치했던 나라들의 이해관계를 확인해 보세요.
2차 고려거란전쟁은 현종의 거짓항복으로 끝이 납니다. 어찌 보면 고려가 거란에게 이기지 못한 전쟁일지 모르나 고려 장수들의 활약과 고려의 기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봅시다.
2차 고려거란전쟁
1차 고려거란전쟁은 993년 고려 성종 때 일어난 사건으로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얻게 되고 거란과 수교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고려 성종과 고려 목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는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전 글 (1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 동아시아는 송나라, 거란, 고려가 대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거란 입장에서는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고려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라는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강조의 정변이란 강조에 의해 고려 목종이 폐위되어 시해된 후 고려 현종이 즉위하게 된 사건입니다. 이 ‘강조의 정변’을 명분 삼아 거란은 고려를 재차 침략합니다.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 거란의 명분이었으나 사실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하는 것을 우려한 조치입니다.
잠시 거란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란은 1004년 송나라를 침입하여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송나라 깊숙이 진격한 거란은 송과 ‘전연의 맹’을 맺습니다. ‘전연의 맹’은 송나라에게는 치욕적인 조약입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송과 거란이 형제국의 의를 맺고 거란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거란이 군사적으로 송나라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후 1009년 거란의 성종은 소태후가 죽고 정사를 직접 맡게 되고 대외정복사업을 추진하며 주변국들을 강경하게 대합니다. 이 시기 거란은 전성기를 맞으며 주변국을 위협했습니다.
이처럼 강해진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다가 강조의 정변을 명분 삼아 2차 고려거란전쟁을 일으킵니다.
거짓항복 그리고 양규의 활약
1010년(현종 원년) 11월 거란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칩니다. 흥화진(의주)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지만 성을 지키는 고려 장수 양규의 활약으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흥화진 공략이 여의치 않자, 거란 성종은 병력의 반을 통주성으로 보냅니다. 통주성은 현종을 왕으로 추대한 강조가 30만 대군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조 역시도 처음에는 거란군을 잘 막아냈으나 거란의 유인책에 말려 결국 성 밖에서 대패하며 사로잡히고 맙니다. 강조는 자신의 부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제안을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강조가 사로잡혔어도 통주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또한 흥화진에서도 양규가 여전히 활약하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죽은 강조의 이름으로 거짓 편지를 작성하여 양규에게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을 받고 싸우는 것이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며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지켜냅니다.
서경도 고려 장수들이 지켜내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진군하는 것을 막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개경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 상황 속에서 고려 현종은 항복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감찬이 이런 현종을 만류하였습니다. 강감찬은 고려 현종에게 남쪽으로 피난 갈 것을 권하고 군대들은 남아서 지구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며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강감찬의 말대로 현종은 피난길에 오르며 나주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고려 현종의 피난길은 처참했습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고, 왕을 지키던 신하들도 도망쳤습니다. 왕의 곁에 남은 사람은 지채문과 하공진 정도였습니다.
하공진은 거란에게 친조하고 자신이 볼모로 잡히는 조건으로 거란과 강화교섭을 요청합니다. 친조란 신하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배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거란 황제에게 고려 임금이 신하임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강화협상을 거란 성종은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거란 성종 역시도 계속되는 국지전에서의 패배와 이국땅에서 치러지는 전쟁에 피로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명분도 불확실한 전쟁을 계속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처음 내세웠던 강조의 단죄는 이미 이루어졌으니까요. 결국 1011년 정월 11일 거란군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거란이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강화요청 즉, 항복을 한 나라라면 응당, 철수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고려군은 거란군을 공격했습니다.
귀주, 통주, 곽주 등을 지키던 양규와 다른 고려 장수들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고려인 포로를 구출했습니다. 특히 양규가 구출한 고려인은 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포로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고 전쟁의 전리품으로 삼으려던 거란에게는 낭패였습니다. 결국 거란은 고려를 침입하여 얻은 것은 별로 없고 손실만 입었을 뿐입니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의 강화요청으로 거란이 철수하였지만 철수 과정에서 거란의 피해는 컸습니다. 또한 이후 3차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현종의 강화요청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거짓 항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황제에게 친조 하겠다는 약조도 지키지 않을뿐더러 철수하는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의 강화요청으로 일단락된 전쟁이지만 고려 장수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전쟁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성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통해 고려 장수들의 위상을 한껏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차 고려거란전쟁 진행과정과 그 속에서 활약한 양규와 같은 고려 장수의 활약상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3차 고려거란전쟁과 강감찬 장군의 활약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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