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story

1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서희와 강동 6주)

by ⊂∵⊃⊆∵⊇∈∵∋ 2023. 11. 8.

10세기 무렵 강성해진 거란은 고려를 침략합니다. 거란은 이 시기 고려를 크게 세 번 침공합니다. 이 글에서는 1차 고려 거란 전쟁 진행과정과 전쟁을 끝내고 강동 6주를 얻어낸 서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2차, 3차 고려거란전쟁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역사를 알고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 재미가 배가 됩니다. 역사 속 등장인물들이 처했던 상황과 국경을 맞대고 대치했던 나라들의 이해관계를 확인해 보세요.

 

 

고려 주변 정세

10세기 무렵 동아시아 정세는 고려, 송, 거란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국제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 12세기 무렵 거란과 고려 사이에 있던 여진(금나라)이 세력을 키워 동아시아 강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 시기 거란은 동아시아 북쪽 초원에서 ‘요’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했다. 중국에서는 5대 10국의 혼란기를 평정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는 거란을 견제하며 송과 친선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
고려전기 동아시아의 정세

 

 

거란은 야율아보기(태조)와 야율덕광(태종)이라는 탁월한 지도자들이 나타나며 요 제국을 세우고 동아시가 강자로 급부상한다. 이후 야율덕광이 죽고 내분을 수습하며 안정기를 찾는다. 그리고 10세기말 거란의 야율융서는 송을 평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고려와 여진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송나라 입장에서도 커져가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고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또 고려 입장에서도 북쪽의 안정이 필요했으므로 송과 거란사이에서 외교적으로 대외관계를 원만히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이 시기 동아시아 정세는 복잡 미묘하게 각 나라가 얽혀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이래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매우 싫어했다. 그 일례로 만부교 사건이 있다.

 

 

만부교 사건이란 태조 왕건이 거란에서 화친을 청하고자 보내온 낙타 50 필을 만부교에 묶어두고 굶어 죽게 한 사건이다. 거란은 고려에 화친을 청하고자 942년 사신 30명과 낙타 50 필을 보내온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은 발해와 화친 약속을 배반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하여, 거란 사신들을 귀양 보내고 낙타들은 만부교 아래 묶어두고 굶어 죽게 하였다.

 

왕건은 거란과 단교를 선언하였고, 이어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며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문물제도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강력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를 남겼다.

 

이처럼 태조 왕건은 거란을 적대하였고 이러한 태조의 북진정책은 후대 왕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

고려, 거란, 송나라로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대립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특히 송나라와 거란이 직접적으로 대치한다.

 

고려거란전쟁

 

986년 송은 군대를 일으켜 거란을 공격한다. 이때 송은 고려에게 거란을 함께 치자고 제안하였으나 고려는 출병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송은 거란에 크게 패하게 된다. 이로써 거란의 힘은 강해지고 송은 방어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후 거란은 여진족을 몰아내며 점차 압록강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거란은 991년 압록강 하류에 군사기지를 설치한다. 고려와 거란이 직접적으로 대치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고려는 여진 세력과 충돌하며 압록강 유역에서 확실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고려는 당시 고려 성종이 즉위하여 내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시기 송나라를 노리는 거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고려를 자신들 아래 두고,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명목 하에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기로 한다. 이것이 993년 1차 고려거란전쟁의 시작이다.

 

서희와 강동 6주

993년 거란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려는 박양유, 서희, 최량을 불러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고려 성종도 직접 서경까지 진출하며 전쟁에 나섰다.

 

 

거란은 소손녕을 필두로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봉산군(황해도 중부지역)까지 진출하였고, 고려의 선봉을 사로잡았다. 전쟁의 상황은 급박하게 진전되었다. 이때 서희는 봉산을 구하기 위해 소손녕과 대치하게 된다.

 

소손녕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명분, 이유를 들며 항복을 권고했다.

“이미 우리가 고구려 옛 땅을 차지했는데, 너희가 변경을 침탈했으므로 토벌하러 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사방을 통일했으니 귀부 하지 않은 나라는 소탕할 것이다. 속히 항복하도록 하라.”

 

하지만 서희는 이러한 권고에서 소손녕의 숨은 속내를 읽는다. 80만이라는 대병을 일으키고 선제공격을 했으면 빠르게 진군하여 공격해야 하는데 항복만을 권유하는 태도를 통해 거란군은 점령이 목적이 아니라 복속이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서희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고려 성종에게 전하자, 성종은 이몽전을 시켜 거란 군영에 다녀오게 한다. 소손녕의 침략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 소손녕은 이몽전에게 거듭 협박하며 항복을 권고한다.

 

이몽전이 소손녕의 협박을 전하자 고려 조정은 겁을 먹고 항복하는 주장과 서경 북쪽 당을 넘겨주자는 의견 등이 제기된다. 고려 성종도 이에 동의하며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적의 군량미가 되지 않도록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을 내린다.

 

이 같은 명령에 서희가 나서서 성종을 설득한다. 넉넉한 식량이 있으면 성을 지키고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유리하며, 백성들의 생명줄과 같은 식량을 버리면 안 된다고 간언 한다. 그리고 다시 거란과 맞설 것을 주장한다. 다행히도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한편 고려에서 항복권고에 대한 답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한다. 그러나 고려군에게 대패한다. 다시 군사를 내기 껄끄러워진 소손녕은 군사행동 대신 항복을 재촉했다.

 

이후 소손녕은 고려에게 대신급 회담을 요구한다. 하지만 거란 진영에 가서 협상하겠다는 대신은 없었다. 그때 서희가 나서서 소손녕과 담판을 짓겠다고 나섰다.

 

외교사절로 나선 서희는 소손녕이 군신의 예를 요구하자, 무례하다며 숙소로 돌아가서 회담에 응하지 않는다. 의전을 문제 삼아 상대의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다. 서희가 당당한 자세로 일관하자 소손녕은 어쩔 수 없이 대등하게 교섭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회담이 이뤄진다.

 

소손녕은 회담에서 2가지를 요구한다. 첫째는 고려가 신라의 후계자이므로 옛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며, 둘째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들과 관계를 맺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서희는 반박한다. 일단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오히려 거란의 동경이 고려의 땅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거란과 고려가 관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강동 6주(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가로막고 있는 여진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여진족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에게 돌려준다면 거란과 관계를 맺겠다고 역으로 제안한다.

강동 6주
강동 6주와 천리장성

 

언뜻 강동 6주를 고려에게 거저 주는 것처럼 보이는 제안이다. 하지만 소손녕은 이 제안을 수락한다. 소손녕이 어리석다 할 수 있으나, 거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쁜 제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송나라를 치기 전 후방을 든든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노리는 송나라 땅에 비하면 강동 6주는 매우 작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당시 소손녕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2차, 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이 강동 6주가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지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과의 1차 고려 거란 전쟁은 끝이 난다. 거란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국토를 잃을 뻔했던 고려는 도리어,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 이후 강동 6주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지역이 된다.

 

서희의 담판

1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활약을 한 사람은 단연 서희이다. 우리는 서희의 담판을 통해 배울 점이 많다.

 

 

서희는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쟁의 목적을 숨긴 거란의 속내를 제대로 간파했다.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고려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무력이 아닌 말로써 얻어 냈다. 그리고 송, 거란, 고려 세 나라의 문제로 불거진 전쟁에서 여진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끼워 넣으며 관점을 전환시켜 강동 6주를 얻어낸다.

 

소손녕이 대군으로 성을 점령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항복만을 권하는 모습에서 상대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도리어 자신의 속내는 들키지 않으면서 상대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는 모습을 통해 ‘외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중국, 미국, 북한,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외교관계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서로가 자기 나라의 실리를 위해 움직이는 상황이다. 이런 국제 관계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도록 협상하는 서희의 모습은 배울 점이 많다.

 

지금까지 1차 고려거란전쟁 진행과정과 그 속에서 빛을 발하며 전쟁을 끝내고 강동 6주를 얻어낸 서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10세기말 국제 정세 속에서 발발한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2차 고려거란전쟁 및 3차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역사 story] - 2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양규 활약)

 

2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양규 활약)

993년 1차 고려 거란 전쟁이 서희의 담판으로 끝난 이후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합니다. 1차 고려거란전쟁은 서희의 외교 회담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났고 3차 고려거란전쟁은 강감찬 장군

storytale.tistory.com

[역사 story] - 3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귀주대첩 강감찬 장군 업적)

 

3차 고려 거란 전쟁 시작과 끝 (귀주대첩 강감찬 장군 업적)

993년 1차 고려거란전쟁은 서희의 담판으로 막아냈고, 1010년 2차 고려거란전쟁은 거짓항복으로 거란군이 철수하였으나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18년 거란은 재차 고려를

storytale.tistory.com

고려거란전쟁 등장인물 7인 (역사 속 인물)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다른 글을 통해 만나보세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