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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story

태조 이성계와 주요사건 요약

by ⊂∵⊃⊆∵⊇∈∵∋ 2021. 8. 23.

조선을 건국한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와 주요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핵심 과정과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알아본다.

 

이성계는 누구인가?

태조는 조선 1대 왕으로 본명은 이성계이다. 1335년에 태어나 1408년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이다.

이성계 가계도를 보면 부인은 6명이고 자녀는 8남 5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에게서 6남 2녀를 두고 신덕왕후 강 씨에게서 2남 1녀, 그리고 화의옹주 김 씨 등에서 2녀를 둔다.

(조선 2대 왕 정종은 신덕왕후 강 씨의 둘째 아들이며 3대 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은 다섯째 아들이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과 주요사건 (조선의 기초를 다지다.)

 

고려 말기는 내부적으로 권문세족이 득세하면서 왕권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외적으로는 외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군사력과 국가 재정 모두 좋지 않았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이 같은 시기에 이성계가 있었다.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시기에 급성장한 신흥 무장 세력이다.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쌍성 총 관부 지역에서 기반을 마련한 변방 세력이다. 쌍성 총관부는 원나라가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침입하여 설치한 통치기 구이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 지역의 향리였으나 쌍성 총 관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에서 세력을 성장시킨다. 이후 원을 적대시하는 공민왕의 정책 (반원 정책)을 통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 총 관부 지역을 고려가 다시 찾을 수 있게 도움으로써 고려의 중앙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쌍성 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한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벼슬을 내린다. 이후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가 된다. 이성계 역시도 아버지와 전투에 참가하면서 공을 세운다.

 

이성계 가문은 변방 세력이었지만 강력한 사병 조직과 지역 인맥을 통한 튼실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젊은 무장 이성계에게 가문의 힘은 큰 힘이 되었다. 또 이성계 자신도 뛰어난 무예와 활 솜씨를 겸비하였고 여진족과 고려인을 아우르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훌륭했다.

 

이성계는 고려 수도 개경을 침입한 홍건적을 격퇴하고 원나라의 침입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운다. 또 여진족 삼선, 삼개의 난을 평정한다. 전투에서의 잇단 승리는 그가 고려 중앙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황산대첩 등으로 왜구의 침입까지 막아 내는 전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고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자연스럽게 인재들이 몰렸다. 이들 중에는 신진사대부들이 있었다.

 

고려 말기는 앞서 말했듯이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므로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었다.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는 세력과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이성계가 있었던 것이다.

 

주요 사건

1388년 위화도 회군

이 시기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밀어낸 후 고려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명나라는 원나라에게서 공민왕이 회복했던 철령 이북 땅을 반납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명의 요구에 대해 당시 고려 우왕은 요구를 거절한다. 그리고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가 아직 혼란한 틈을 타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이때 요동정벌을 위해 이성계에게 중임을 맡긴다. 하지만 이성계는 사 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태조 이성계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어쩔 수 없이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떠난다. 
이후 이성계 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하게 된다. 하지만 큰 비를 만나게 되면서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상황에서 이성계는 물에 빠져 죽더라도 진군할 것인지 군대를 되돌릴 것인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 회군을 결정한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은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명을 거스른 반역이었으며 군사력으로 개경을 점거한 쿠데타이다. 쿠데타로 실권을 쥐게 된 이성계는 우왕을 내쫓고 최고 권력을 갖게 된다.

 

이성계에게 도움을 준 세력에는 공민왕 때 중앙 정계로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이 있다. 이들은 유교사상을 중시하고 성리학에 심취한 이들이다. 당시 신진 사대부는 두 부류가 있었다.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고려왕조 자체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로는 정몽주, 급진파로는 정도전이 대표적이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과 결탁하여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 시기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지배계층의 입지를 마련했다.

 

1392년 조선 건국

이성계는 1392년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고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은 숭유억불, 농본주의, 사대주의였다. 숭유억불은 유학을 높이 여기고 불교사상을 억제하는 정책이며, 농본주의는 국가의 산업은 농업이 중심이며 사대주의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라 하여 중국을 사대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왕조 500년의 근간이 된다.

한편으로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세력이 커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한다. 또한 경제육전을 편집하여 법치주의를 통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한다. 경제육전은 경국대전 이전까지 조선 법전의 기초가 된다.

 

1394년 한양 천도

이성계는 1394년 무학 도사의 도움으로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궁궐을 짓는다.

한양 천도의 이유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이전함으로써 기존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목적이 있다.

2. 개경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땅의 기운이 쇠하여 새 왕조에 좋지 않다고 믿었다.

3. 세금으로 걷는 쌀 등의 수상운송을 용이하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

4. 군을 운용함에 있어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했다.

 

 

1395년 경복궁 창건

한양으로 천도하고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조선 최초의 궁궐 (경복궁)을 짓게 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하였다. 이 시기에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먼저 지어지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다.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된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에 의해 지어졌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자손, 백성들이 큰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의미다.

 

경복궁이 지어졌으나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개경 천도(정종 때)와 한성 환도(태종 때)를 했으므로 10여 년 동안 궁궐로서 제구실을 하지는 못했다. 경복궁이 실질적으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세종 대에 이르러서이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은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게 도운 세력은 다음과 같다.

 

1. 신진사대부 (정도전)

2. 이방원 (이성계의 첫 부인 한 씨(신의왕후)의 아들)

3.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강 씨 (신덕왕후)

 

이들 중 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공로로 자신이 세자 책봉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강 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추구하는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강 씨는 이방원보다는 자기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다. 결국 이방원의 바람과는 달리 강 씨의 아들 이방석이 세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으로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에서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을 모두 제거한다. 이로써 이방원은 더욱더 강한 실권을 갖게 된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을 잃고 왕위를 두고 싸우는 자식들을 보며 회의를 느끼게 되고 1398년 왕위를 둘째 아들 이방과(정종)에게 물려주었다. 다시 한번 왕위를 얻지 못한 이방원이었으나, 왕위 찬탈의 오명을 쓰기보다는 잠시 왕위에 오르는 것을 유예한다. 2년 뒤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넷째 형 이방간을 물리치고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다.

 

조선 2대왕 정종과 2차 왕자의 난 사건 요약

 

왕자들의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로부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를 도성으로 모셔오려고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가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아무 소식이 없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태상왕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성계 묘(능)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이다.

 

요약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과 이성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에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태조 (본명 : 이성계)

조선 1대 왕

출생 1335년 ~ 사망 1408년

재위 기간 : 1392년 ~ 1398년

주요 사건 : 위화도 회군, 조선 건국, 한양 천도, 경복궁 창건, 1차 왕자의 난

주요 인물 : 정도전, 이방원, 정몽주,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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