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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story

광개토대왕릉비 내용과 임나일본부설 (왜곡하지마!)

by ⊂∵⊃⊆∵⊇∈∵∋ 2023. 7. 2.

광개토대왕에 대한 자료가 적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비는 그의 업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비문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왕의 행적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비석의 내용을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쓰인 내용과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개요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으며 독립기념관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다음 왕위에 오른 장수왕이 414년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광개토대왕릉과 함께 세운 비석이다. 당시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광개토대왕비 사진
광개토대왕비

 

이 비석의 모양은 불규칙한 직사각형의 기둥모양 (직육면체)이다.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 부분이 약간 좁다. 응회암이라는 돌로 되어 있으며 겉면이 거칠다. 우리가 흔히 보는 비석처럼 매끈하지 않다. 비석의 사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총 1775자의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높이는 6.39미터이다. 아파트 2~3층 높이이다. 네 면의 너비는 각각 1.5m 정도 된다.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의 업적만큼이나 실로 거대한 비석이다.

 

광개토대왕비 글자 사진
광개토대왕비 비문

광개토대왕릉비는 1875~80년경(추정) 청나라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역주민들은 글씨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모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에 매우 큰 돌이라고만 보았을 뿐, 비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 시기에는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만주족 황제의 비석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후 탁본을 통해 글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광개토대왕릉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내용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내용

  1.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출생과 건국 역사
  2. 광개토대왕의 생애와 업적
  3.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운 이유
  4. 왕의 무덤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수묘인)에 대한 규정

비문에는 주몽의 출생과 고구려 건국 역사가 담겨 있다.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고 천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나오니 날 때부터 성스럽다.”

 

또한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의 시호와 업적이 적혀 있다. 시호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국강상 지역에 있는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든 위대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 시호를 따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한 기록이 연도별로 적혀 있다.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10년 경자년에 보병,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금관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이 곧 항복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가 나라를 잘 다스렸음을 잘 보여준다.

“왕의 은혜는 하늘에 닿았고, 그 위엄은 온 세상에 끼쳤다. 불측한 무리를 몰아내어 누리의 백성이 생업에 힘쓰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했으며,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왕릉을 관리하기 위해 지정한 백성 330호의 출신 지역과 이름을 담은 수묘인연호가 기록돼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을 계승한 위대한 국왕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영광을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임나일본부설이란 왜 나라 야마토 정권이 4세기에 가야 지역을 쳐서 통치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쪽 지역을 다스렸다는 일본의 학설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비문은 일부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고 지워진 글자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특히 일부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고 풀이한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 백잔신라구시속민 / 유래조공 / 이왜신묘년래도해 / 파백잔 00 신라 / 이 위 신민"

이 구절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다.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00,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즉, “일본이 신묘년(391년, 광개토대왕 즉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1910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침략 행위가 올바른 일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기 때문에 주어가 왜가 아니라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부터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또한 신묘년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왜는 백제와 신라로부터 문화를 전파받고 있었다. 즉, 백제나 신라가 왜보다 선진국이었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비문변조설이란?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변조,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를 일본 학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 제국주의 일본 군인이었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을 일본 쪽에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비문에서 석회 성분이 발견되면서 일부러 비문에 석회를 발라 내용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석회가 발견된 이유는 탁본을 뜨기 편하게 하려고 바른 것이라는 해명이 나왔다. 그리고 비문을 변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비문의 내용을 알아야 가능하다. 즉,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고서는 판독이 쉽지 않기 때문에 비문의 어느 부분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고칠지 그 당시 판단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련된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자료가 짧게 서술되어 있고 중국의 사서에도 그의 자료가 적습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이 비석은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의 정세를 알 수 있는 근거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고 있어야 일본이나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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